꽃 피는 봄날, 늙은 소가 늙은 인간을 태우고 시골길을 힘겹게 걸어갑니다. 소의 엉덩이에는 똥이 말라 붙어 있습니다. 그것이 화면에 클로오즈 업 되자, 관객 중 젊은 여자들의 탄성이 새어 나옵니다.
"아! (더러워......이 말이 생략 되었겠지요.)
첫 화면을 나는 이렇게 기분 나쁘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시골에서 맡았던 소똥 냄새가 영화관을 가득 채우고 있는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마지막, 소가 마지막 숨을 몰아 쉴 때, 늙은 인간은 소가 평생 콧구멍에 끼우고 살았던, 그가 평생 소를 부리고 학대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인, 코뚜레를 끊어 줍니다. 그제서야 소는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늙은 인간은 양심은 있었습니다. 죽는 순간 만큼은 소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을 겁니다. 나는 그 순간 또 다시 처음의 아! 하는 감탄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눈여겨 보지 않았습니다. 소똥이 더러울 때는 아 하다가 소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그를 평생 억압했던 코뚜레가 풀어질 때, 소가 장지로 가기 위해 트럭에 실려 갈때, 구덩이에 소의 시체가 던져지고 포크레인이 흙으로 덮을 때, 아무도 그를 위해 안타까운 감탄사 아!는 새어나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더러운 똥만을 위해 아! 했던 거죠. 여자들은 역시 깨끗하긴 한가 봅니다.
비오는 날, 병원에 가기 위해 늙은 인간은 시내로 갑니다. 비 오는 날에도 진보적인 시민들은 한미 FTA 반대 시위를 합니다. 그 앞을 소와 늙은 인간은 지나갑니다.
"미친 소 수입을 반대한다!"
소와 늙은 인간은 그것에 전혀 관심도 없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도 모릅니다. 오로지 감독의 연출인거죠.(감독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작은 소도시 영주에서 비 오는 날, 그것도 소와 늙은 인간이 지나가는 시간에 맞추어 시위를 한다는 것이 우연치고는....) 그런데로 괜찮던 영화가 이 부분에서 저의 기분을 또 한번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니, 그 설정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영화를 다루는 감독의 테크닉의 협소함에 실망한 겁니다.
굳이 그런 설정을 않더라도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은 현재의 한국 축산 상황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영화에서 그전에 벌써 소 중간 상인들과 늙은 인간간의 실랑이가 있었습니다. 그 우연인 것같이 보여준 억측 같은 설정이 이 영화에 가장 큰 단점이었습니다.
마지막, 앤딩의 자막이 올라갑니다.
"이땅의 늙은 부모님과 소.....어쩌구 저쩌구..이 영화를 바칩니다..."
여기서 저는 기분이 또 한번 확 상합니다. 소에게 영화를 바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인간에게 이 영화를 바치다니. 평생 코뚜레를 끼우고 부려 먹다가 죽을 때서야 그것을 풀어주는 아량(?)을 베푼 인간에게까지 이 영화를 바치는 것은 넌센스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영문도 모르는 늙은 인간이 우시장에 가서 거저 가져가라고 해도 가져가지 않는 소를 500 만원에 팔려고 했다는. 아마, 누군가 미친 놈이 그 소를 500 만원에 산다고 했다면, 늙은 인간은 조금 슬펐겠지만 팔았겠지요. 이 부분에서 저는 둘째 딸과 의견이 맞지 않았습니다.
"아니야, 할아버지는 500 만원을 줘도 절대로 안팔았을 거야."
둘째 딸의 믿음은 확고 했습니다. 그래야 이 영화가 아름다운 거죠. 그래야 아름다운 신파가 되는 거죠. 요즘 사람들은 갈수록 신파가 되어 갑니다. 아마 현실이 팍팍하게 어렵게 되어 가니 신파라도 믿고 싶은 거죠.
둘째의 소녀다운 감성에 굳이 흙을 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첫째와 둘째에게 글쓰기 숙제를 주었죠.
첫째에게는,
"이명박이도 이 영화를 보았다는데,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진보 보수 양쪽에서 전부 호응을 받았다. 그래서 이 영화를 바라보는 진보적인 시선과 그렇지 않은 시선이 무엇인지 설명을 해보고, 이 영화는 분명 다큐멘터리 영화이지만, 감독의 연출과 설정이 틀림없이 들어 가 있다. 거기에서 가장 어색하다고 느낀 부분. 그리고 그 설정이 오히려 영화의 주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지적하고 그 이유를 설명해라. A 4 용지 네 장의 분량이다."
둘째에게는,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왜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지 할머니의 입장에서 설명해 보아라. 그리고 너는 아빠와 반대로 할아버지가 우시장에서 500 만원을 주어도 안 팔았을 거라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을 해라. A4 용지 두 장이다."
워낭소리를 보고 나서도 소의 코뚜레가 자꾸 눈에 밟힌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살 날이 일 년 밖에 안 남았다는 소.
그 소를 대신할 젊은 소가 들어오자 바로 외양간에서 쫓져나는.
그 소가 죽어야 노인이 내가 편해진다고 끊임없이 잔소리하는 할머니.
아홉 남매를 키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 그러나 이제 리어카를 매달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몇 걸음 떼고 발을 멈추고 서서 쉬어야 하는 그 늙은 소를 타고 읍내 병원까지 강행군을 하는 노인과 할머니.
멍에를 이기지도 못하는 소를 논으로 밭으로 끌고 다니며 일을 시키는,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면서도 일을 하는 노인과 피둥피둥 살오른 자식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노인과 소
저는 소를 당장 안락사 시키고 싶은 심정이었답니다.
노인도 그만 일을 시키고, 편안히 노인 복지 단체에 보내드리고 싶었고..
그런데, 시골 집에 와서 고기를 구워 먹던 피둥피둥 살찐 자식들..
아버지 그만 일시키기 위해서는 소를 팔아야 한다던 자식들...
저의 불편한 심기는 더욱 오버 하기 시작합니다.
상어와 쓸데없이 싸워야 하는 헤밍웨이 소설, 노인과 바다...
그리고 인간 추잡한 욕심을 아름답게 포장한 노인과 소(워낭소리)...
자신의 식탁 위에 안전한 소고기를 위해 싸웠던 촛불...
그것에 덩달아 춤추던 좌파들....
그 어디에도 동물은 없습니다.
소는 없고 소고기만 있었습니다.
앤딩 크래딧이 올라가기 전 친절한 나레이터가 말합니다.
그 소가 두 노인을 위해 저토록 많은 일을 하고 죽었다고. 화면에 그 많은 장작더미가 비칠 때는 화까지 나더군요.
죽을 때까지 부려먹고, 그것 때문에 감동을 하는 인간들.....
내가 동물 애호가는 아니지만(그러면서 나는 에코아나키스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그 소가 일소라지만 아프다고 말도 못하는 짐승을,저토록, 뼛속까지 부리다 죽인게 우정인가, 감동인가 싶어서..
만약 소가 아니고 사람이었다면, 이런 영화가 감동적일 수가 있을까 하는.
우리는, 소고기만 생각하지 소를 가슴에 안은 적이 없지요.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저는 너무나 호들갑을 떨기에 소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잔뜩 기대를 했었는데...촛불에 버금가는 영화더군요.
그걸 잠시라도 느껴보고 싶었는데...실망이 컸지요.
할머니의 잔소리...돼지 처럼 살찐 자식들이 고기 구워 먹는 모습..그러면서 소를 팔라고...
그리고 다른 한편에 떠오르는 영상.
촛불 시위....참 많은 진보 좌파들이 날뛰었고,당장 세상이 바뀔 줄 알았지요.
그러나 그곳에는 진정한 진보는 없었습니다.
소고기만 있었고 소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고기에 미친 인간들......
살찐 인간들.....
더 좋은 고기를 먹으려는 인간들.....
더 잘살려는 인간들...
잘 먹고 잘 살아라!
더러운 인간들!

